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최위숙  
2009-09-16
2573
755
없음
다시 열어본 책에서
정성스럽게 밑줄을 긋고 내 나름대로 의견을 깨알같은 글씨로
써 놓은 것을 보게 되는 경우가 있다.
이를 테면, 반성완이 번역한 게오르그 루카치의 '소설의 이론'
(심설당, 1978)에는 특히 많은 밑줄과 여백에 써 놓은  글들을 볼 수가 있다.
누가 시켜서라면 결코 이렇게 하지 못했을 것이다.
그 책 110페이지 여백에
'현실에 대한 이념의 패배는 결코 궁극적 패배가 아니다.
왜냐하면 현실 또는 무가치의 세계는 그 또한 궁극적 승리를 거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. 궁극적 승리가 아니라는 것은, 그것이 무의미한 채로, 즉 '낙원을 잃어버린 채'로 여전히 남아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. 그것의 무의미는 언제든지 공격 받을 수 있는 허술한, 단지 '존재 상태'에만 있는 까닭이다.'
라고 썼다.
그러나  날더러 다시 이런 의식 세계 속으로 들어가라고 한다면,
글쎄... 이제는 자신이 없다.
늘 이런 식이다.
책들은 예전과 별 차이 없이 지금도 나를 에워싸고 있다.
어떤 책에는 특별한 감동을 받았다는 둥,..
유치하기 짝이 없는 낱말의 남발들이지만
열정적으로 메모했던 숱한 밤들도 있었다.
그러나 이젠 마치 다른 사람이 해 놓은 것을 보는 것과 꼭 같은 '낯설음'으로
보게 된다. 기억에서 깨끗이 증발되어 버린 경우가 허다한 것이다.
그 휘발되어 버린 기억이 더 안타까운 것은 내가 밑줄까지 그어 가며
꼭 기억하고자 했던 것이기 때문이다.

그러나 나는  할머니댁 안방 윗목에 놓여 있던 콩나물통을 생각하며
위안을 얻는다. 콩나물통은 늘 검은 천으로 덮여 있었다.
아래쪽에는 Y자로  벌어진 나무가지가 더 큰 옹기그릇 위에 얻혀 있었다.
물을 부으면 콩나물통을 통과하여 큰 옹기그릇에 고이게 되는 것이었다.
검은 천을 들치고 할머니는 가끔씩 또는 자주 물을 주었다.
흘러내려 큰 그릇에 받힌 그 물을 다시 퍼 주는 것이었다.
콩나물은 물을 기억하지 못할 것이다. 그래도 콩나물은 자란다.
콩나물이 필요한 부분은 물이 흘러내리는 그 순간에
이미 다 흡수하고 나머지는 과감히 내려 보냈을 것이다.
세상일이란 모두 한순간, 찰나에 일어났던 것이다.
내가 경험한 많은 일들과 독서 체험들도 아마 그럴지도 모른다.
나는 그것들을 다 기억하진 못한다. 하지만 알게 모르게 나를 살찌우고,
내 인식의 폭을 넓혀 왔을 것이라고 믿는다.
책읽기는 그리고 삶은 그런 것이었다고 생각했다.

한 번 준 물을 다시 주듯이 적절한 피드백을 통하여 우리들 시간은 더욱 풍부하게 되는 것이며,
삶의 깊이는 더해지는 것이리라.
그런 의미에서 내 주위에 둘러싸여 있는 허접한 책들을 다시 열어서라도
잃어버렸던 '생각'들이 살아나길 바래본다.
젊은 날 형형하게 빛나던 그 눈빛도 기억해 주면 좋겠다.

이제 겨우 나이 오십줄에 흐리멍텅하게
어제 한 일도 까맣게 잊고 지내는 오늘이다.
참으로 가관이다.
         
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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